
2016. 3. 31 출간 / 121×188mm / 192쪽 /
12,000원 / ISBN 979-11-952770-5-6 (03810)
요리 활동
어떤 싸움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일상이 중요하니까
지은이: 박영길
보도자료
“자, 식사부터 하세요”
살 만한 세상, 좋은 일상을 향한 우리의 싸움이 더 오래가도록!
지치지 않는 일상을 만들어가는 ‘공생의 요리’를 선보인다
쿡방의 시대,
쿡방에 없는 ‘공생의 요리’를 선보인다
요새 방송 프로그램의 대세는 ‘쿡방’ 즉, 요리 방송이라고 한다. 하얀 두건을 쓴 셰프가 앞치마를 휘날리며 현란한 칼질을 뽐내는 장면은 이제 흔한 이미지다. 그들이 만들어낸 요리는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입맛을 자랑하는 평가자의 입에 들어가 결국 그들의 값비싼 탄성과 함께 완성된다. 그런데 요리의 세계가 꼭 이런 것일까.
『요리 활동』은 값비싼 메뉴를 혼자서 음미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요리의 행복을 선보인다. 저자 박영길은 고된 하루의 활동을 마친 이웃들과 든든한 일상을 나누고자 ‘공생의 요리’를 만든다. 이 책은 돈이 없어도 풍족하게 즐기는 요리들, 험난한 하루의 끝에서도 깊은 위로를 주는 박영길의 요리들을 소개한다.
요리사가 아닌 ‘활동가’의
반자본주의적(?) 요리책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65-17번지. 이곳에는 지역의 활동 단체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이 운영하는 공간인 ‘마을카페 이따’가 있다.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은 6년 전, 지역의 공부방 교사들이 뜻을 합쳐 만든 단체다(공룡은 ‘공부해서 용 되자’의 줄임말이다). 공룡의 활동 모토는 ‘반자본주의, 일상성, 공동체성’이다. 첫째, 돈과 효율성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살아보자. 둘째,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함께하자. 셋째, 활동과 삶이 괴리되지 않도록 서로의 일상을 돌보자는 것이 이곳이 만들어진 동기이자 목표다. 공룡 활동가들은 이 세 가지를 중요한 가치로 삼으면서 지역과 마을을 중심으로 삶과 작업, 일상과 교육을 연결하는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요리 활동』의 저자 박영길은 바로 이곳 공룡을 만든 활동가 중 하나다. 그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에 맞서 힘든 싸움을 하는 지역의 노동자와 활동가들을 마을카페 이따로 초대하거나 때로는 현장에 찾아가 요리를 선사한다. 지역 공부방 활동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지역 청소년들도 이곳에서 밥과 요리를 나눈다. 이곳은 카페일 뿐만 아니라 ‘지역 꼬뮌학교 동동’이라는 인문학 수업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공룡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이 거점 공간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지미스 홀>에 나오는 마을 공간처럼, 지역의 ‘래디컬 스페이스’로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자격증이 있는 요리사가 아니다. 당연히 식당 혹은 주방을 가진 셰프도 아니다. 하지만 이웃들과 연대하는 노동자 및 활동가 들에게 그는 그 어떤 유명 셰프보다 귀한 요리사다. 『요리 활동』에는 저자가 그들과 나눈 요리들, 그리고 그 소중한 시간들의 기록이 담겨 있다.
요리를 통해 기억하는
가난해도 기꺼운 삶의 풍경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에게 ‘요리는 무엇일까?’를 자문해본다. 그 대답의 하나는 저자에게 있어 요리란 부모와 함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기억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의 요리 이야기 중 절반 이상에 부모와의 추억들이 스며 있다.
이제 70대 노인이 되어버린 부모, 그래서 그분들의 하루하루가 곧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나에게, 요리는 부모를 기억하고 내 몸에 그들의 삶을 각인시키는 훈련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머니의 조리법들, 아버지가 해주던 음식들… 가난하던 그 옛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었던 어떤 음식에 대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재현하는 도구로 내게 요리만 한 것이 없는 듯하다.
<들어가며 – 일상의 재구성을 위한, 요리 그리고 나>, 9쪽
그리고 요리를 통해 저 시간들을 되살리면서 확인하는 것은, 비록 가난했지만 그 가난을 행복하게 ‘요리’하며 살았던 저분들의 힘과 지혜다. 그 덕분에 저자는 어린 시절의 가난을 불행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행복감의 원천’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확인한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뚝딱뚝딱 맛있는 걸 만들어주시던 어머니가 선물해준 행복한 세계가 지금 나에게도 여전히 힘을 북돋워준다. 나는 비록 돈이 없어도, 함께 활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어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 한 내 삶 역시 지속될 수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나는 그런 믿음을 부모님의 삶에서 배운 것 같다.”
험난한 세상, 무너지는 일상
하지만 잘 먹고 잘 싸우자
세상이 험난해도 그것을 버틸 수 있는 힘은 다시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나온다. 저자는 요리가 비록 소소하지만 일상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버팀목이라고 믿는다. 요리를 통해 일상이 무너지려는 순간을 버티고, 나아가 일상생활을 살 만한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가 부모로부터 배운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소소한 일상을 지키고, 일상에서의 작은 행복들을 잘 ‘요리’하는 일은 어쩌면 거대한 이데올로기 투쟁만큼 강력할 수 있다.
요리는 언제나 일상이다. 어머니가 식당 찬모로 생계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자란 어린 시절부터, 각자 활동을 하다가 저녁이면 공룡에 모여 저녁 한 끼를 해결하는 공룡 활동가들을 위해 뜨끈한 국과 맛있는 술안주 하나 만들어놓고 밤 직장에 출근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요리는 언제나 일상생활의 소소한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은 한 부분이라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버티며 살아가는 것, 나는 이러한 태도가 일상성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지극히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면서도 작은 일상들을 무시하지 않고, 거기에서부터 어울리고 연대하며 새로운 것들을 꿈꾸는 생성의 장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내가 공룡 활동가들과 요리를 함께 만들고 먹는 일에 욕심을 부리는 이유이다.
요리는 언제나 일상이다. 그리고 날마다의 일상을 재구성하고자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한다.
<들어가며 – 일상의 재구성을 위한, 요리 그리고 나>, 10-11쪽
재료가 부족해도 좋다, 정통이 아니어도 좋다
음식이 품고 있는 삶이 더 중요하다
〈치킨 가라아게〉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릴 적 서울 사는 외사촌들이 놀러오자 저자의 어머니는 호기롭게 닭을 튀겨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만든 것은 토막낸 닭에 치킨 파우더를 묻혀 튀긴 ‘치킨’이 아니라 시골 식으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튀긴 ‘통닭’이었다. 당연히 외사촌들은 실망스러워했고, 어머니는 “서울 것들이라서 참 까탈스럽네” 하고 볼멘소리를 뱉으신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외식은 못 시켜도 무엇이든 손수 만들어 먹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어머니는 곧 어머니식의 ‘치킨’을 개발해 자식들을 먹인다. “이게 도시에서 먹는 치킨이라는 거야.” 귀여운 허세도 빼놓지 않으신다.
이 글의 저자 역시 종종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의 심지어 먹어보지도 못한 요리를 만든다. 흔히 본고장에서 그곳의 맛과 문화를 배우고 돌아와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는 정통파 입장에서 ‘야매’도 이런 야매가 없다. 저자는 자신이 ‘가라아게(전분을 살짝 묻혀 튀기는 요리)’라 부르며 만들던 일본식 닭튀김 요리가 실은 ‘고로모아게(튀김옷을 입혀 튀기는 요리)’에 가까움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친구에게 ‘아게다시도후’라는 일본 요리를 해준 뒤 ‘일본의 아게다시도후와 다르지만 더 맛있다’는 다행스러운(?) 평가를 듣고 마음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저자는 왜 자꾸 이런 요리들을 만드는 걸까? 저자가 농담처럼 말하듯이 단순히 허세 때문일까? 저자는 이탈리아에서 정통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거꾸로 정통을 너무 의식하지 말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정통보다 소중한 것은 결국 그 음식이 품고 있는 삶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정통이라는 요리들도 결국 각 동네에 흔한 재료들로 대충 만들다보니 정통이 된 게 아닐까 싶다. (…) 결국 이탈리아에 가서 현지 음식을 먹어 보고 느낀 것은, 요리를 할 때 정통 방식이라는 것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있는 재료들을 써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법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굳이 어딘가의 혹은 누구의 정통 방식을 따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건 요리 비법도 아니고 세계적인 메뉴들도 아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자산들 즉, 동네 치즈, 동네 와인, 동네 수제햄 같은 자산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식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그 지역 사람들의 일상이 바로 우리가 부러워하고 본받아야 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토르텔리니>, 95~96쪽
차례
들어가며 _ 일상의 재구성을 위한, 요리 그리고 나
1장 _ 나, 식당 찬모의 아들
칼국수
돼지고기 두루치기
무쌈만두
굴국밥과 굴전
짜장
붕어찜
김치 볶음밥
김치 요리
개떡
된장국
수육 두루치기
스키야키
단호박 해물찜
콩나물국
치킨 가라아게
약밥과 약식빵
오삼 불고기
2장 _ 너와 나의 무너지지 않는 일상을 위하여
물 마리니에르
아쿠아파자
토르텔리니
크림 파스타
어향동구
돼지고기 부추 숙주 볶음
애호박찜
짬뽕
돼지족발
아게다시도후
3장 _ 뜨끈한 양식, 뜨거운 연대
묵밥과 연잎밥
고갈비
여주 볶음 ①
여주 볶음 ②
볶음 고추장
곱창구이
고로케
부야베스
깐풍기
수삼 튀김과 송사리 튀김
짜조
4장 _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함께 요리를 먹는다는 것
무밥
꼬꼬뱅
매생이 굴국밥
사천식 해물 파스타
유린기
토마토 치킨 커리
계란찜과 계란말이
꼬치구이
꽃게
저자 소개
박영길
서울에서 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와 식당 찬모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없는 살림에 먹고는 살아야 해서 아버지 고향 동네로 이사했다. 그 덕분에 가난한 소작농 자식으로 무탈하게 살아왔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어릴 때부터 가내 농업에 동원되었다. 농사일로 항상 바쁜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내게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가 직접 해먹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취를 하면서 혼자 밥 해먹는 일에 더욱 익숙해졌다. 충북 청주에서 사람들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을 만들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방 일에 재미를 붙였다.
정성을 듬뿍 쏟은 요리보다는 뚝딱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먹고 즐기는 주점 요리가 편하다. 한마디로 소중한 한 명을 위한 요리보다는 여럿이 나누는 요리가 더 편한, 묘한 습성이 생겨버렸다.
요리하길 좋아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내가 식당 찬모였던 자신의 손맛을 이었다고 좋아하시는데 아버지는 내가 하는 요리가 하나같이 근본 없는 요리라며 싫어하신다.
현재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서류상 대표이자 주방 담당이다. 청소년 인문학 수업을 맡고 있으며 ‘지역 꼬뮌학교 동동’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낮에는 앞에 적은 일들을 하고, 밤에는 사회적기업 ‘삶과 환경’의 수거원으로 일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충북평등지부 삶과환경 분회 사무장을 맡고 있다. 땡땡책협동조합의 이사로도 일한다. 공저로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삶창)가 있다.
책 속에서
우리들을 과연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를 오래 고민하면서, 특히 일상의 재구성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소위 공동체를 표방하며 일상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결국 의식주의 문제에서부터 어떤 일상들을 함께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공동체적인 성격을 강화하고자 선택한 것이 바로 ‘식사 공동체’였다. 애초에는 공룡을 ‘활동가 네트워크’ 형태의 공동체로 생각했었기에 처음부터 주거 공동체 수준의 실험을 하기는 부담스러웠고, 각자 자신의 활동 영역도 명확한 터라 일종의 생산/소비 공동체의 성격을 부여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인 일상의 경험으로써 함께 요리하고 먹는 경험을 나누는 ‘식사 공동체’의 성격을 만드는 것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릴 때부터 해오던 요리라는 행위가 어쩌면 특별한 무엇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요리를 하면서 요리가 몸에 익듯이 요리를 통한 생각들도 익어온 듯싶다.
<들어가며 – 일상의 재구성을 위한, 요리 그리고 나>, 6쪽
요즘 들어 요리사라는 직업군이 각광받는 듯하다. 하얀 앞치마와 흰 두건을 두른 요리사가 온갖 감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음식들을 화면 가득 선보이면 사람들은 요리가 근사한 로맨스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한다. 그러면서 요리사라는 직업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스타 요리사들은 근사해 보인다. 연예인처럼 동경의 대상이 된 그들의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보고 있자면 요리도 마냥 근사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느 식당에도 그런 근사한 요리사는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요리사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아주 유명한 요리사가 운영하는 맛집을 갔다 해도 말이다. 그 식당 주방에서 실제 요리를 하는 사람은 근사한 요리사가 아니라 피곤에 절어 바삐 움직이는 주방 아주머니 혹은 소위 찬모다. 그이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요리를 좋아한다. 요리를 해서 누군가와 맛있게 먹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걸 좋아한다. 아니, 어머니를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건지도, 아니면 식당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에게 괜히 짜증을 냈던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온종일 식당 일에 지친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만들어주면서 미소짓던 짧은 순간, 그 모습을 절대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요리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리사의 아들이 아니라 식당 찬모의 아들이다.
<1장 – 나, 식당 찬모의 아들>, 19~22쪽
“너 밥은 해먹고 다니냐?“
“매번 해먹는데 오늘만 바빠서 건너 뛴 거에요”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데?”
“김치 먹고 살지. 왜요?”
“이놈 새끼가. 그러니까 김치로 뭘 해먹고 사냐고?”
“볶아 먹거나 그냥 먹거나 하지. 왜요?”
“그러니까 김치가 있는데 왜 그지같이 살아? 용돈은 다 뭐하고? 응?”
“그러니까 김치만 줬는데 뭘 더 해먹어요. 도대체!”
“에휴. 내가 못 살아. 에휴.”
이런 대화 후에 어머니는 그야말로 김치 요리를 했다. 어머니의 김치 요리란 이런 식이다. 김치에 닭 넣고 끝.
<김치 요리>, 46~47쪽
“영길아… 그래서 요즘 뭐 읽냐?”
“요즘 키에르케고르 읽어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뭐?”
“아, 그러니까 철학책 읽는다고요.”
“그런데 왜 죽는 병이야?”
“죽는 병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 그냥… 절망에 대한 책이에요.”
“너 요즘 힘드냐? 집이 요모양 요꼴이라 쪽팔리냐? 응? 그래서 힘들어?”
“아, 뭔소리야…. 그냥 읽는 책이라고요.”
“에휴, 가난이 웬수지… 에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누구나 다 읽는 책이야, 내 나이 땐… 엄마도 참 내.”
“그러니까 이놈아. 가난한 집 자식이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면 겉멋에 빠져 사는겨. 알어?”
조개찜이 그렇다. 조개찜 만드는 법은 그냥 조개를 푹 삶는 게 다다. 만드는 법에 전혀 특별할 게 없지만 엄청 맛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개찜 요리는 여기에 청양고추를 한 개 정도만 넣어서 삶듯이 쪄내는 조개찜이다.
그런데 물론 이렇게만 먹어도 맛있지만 손님 대접용으로는 조금 밋밋하달까? 이왕 요리를 했으면 뽐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뭔가 아쉽달까? 어머니 말씀대로 그것이 겉멋이고 쓸데없는 짓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괜히 겉멋을 부리고 싶을 때면 이 간단한 조개찜을 엄청난 요리로 부풀려서 해보곤 한다.
<아쿠아파자>, 90~91쪽
커리는 재료만 제대로 갖추면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적인 요리다. 커리의 강한 맛 때문에 융통성이 많지 않다는 뜻인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실패할 확률도 적음을 의미한다.
오일 두른 솥에 마늘을 넣고 살짝 볶다가 양파와 피망을 넣고 볶은 후 토막 낸 닭을 넣고 볶는다. 이때 고춧가루를 넣어서 함께 볶으면 닭에 매운 맛이 배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이 넣으면 맛이 탁해지니 대신 고추기름을 조금 넣어서 매운 풍미를 돋운다.
그러고 닭이 어느 정도 익을 때까지 볶다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는다. 원래 생토마토를 넣으면 좋지만 재료값이 비싸니 토마토 페이스트를 한 병정도 넣고 생토마토는 5개 정도 조각 내서 넣으면 적당하다.
그런 후에 타지 않을 정도로 물을 조금 넣고 닭이 익을 때까지 끓이다가 마지막에 커리가루를 넣어 맛과 농도를 조절하면 된다.
토마토 치킨 커리에서 중요한 건, 토마토 페이스트 맛이 강해서 커리의 매운 맛이 죽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닭과 야채를 볶을 때 매운 맛이 잘 배도록 고추기름을 충분히 넣어 잘 볶는 게 팁이라면 팁이다.
<토마토 치킨 커리>, 178~179쪽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들 제대로 된 삶이란 엄청난 것들로 이뤄지고, 그런 엄청난 것들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와서가 아닐까. 그러니 당연하게도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것들은 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노력하지 않고 뭔가를 얻는 건 죄스럽고, 그런 걸 좋아하면 나쁜 사람이라도 된 듯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엄청난 것들만 바라보며 살다가는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아예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걸 노력하다가 망쳐버리기가 일쑤다.
언젠가 보선이 계란프라이를 예술적으로 반숙하는 방법을 묻길래 나는 아주 단순하게 일러줬다.
“덜 익었을 때 불을 꺼.”
(…) 이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노력에 노력을 더할까 싶다.
<계란찜과 계란말이>, 181~183쪽